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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근(2004.5.27) 노대통령은 특강을 통해 여러가지 개혁의 포부를 밝히는 가운데 한 가지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중요한 문제의 언급이 있었다(주요 인간지에서 그 언급사실도 보도하지 않았고 라디오에서 잠시 육성으로 소개되었다)
다름아니라
"한국은 변경"이었다는 것이고
"변경의 위상을 벗어나야"한다
는 내용이다. 대통령은 이미 취임사에서도 그런 견해를 밝혔었다.
<2>전에는 중국의 당로자가 한국을 방문하여 한국에 유교문화가 중국에서보다 더 많이 남아 있다고 말하면서
"이렇게 유교문화가 잘 보존된 것은 한국이 변경문화임을 증명한다"고 하였다.
그리보 부연하기를
'문화는 중심부에서보다 변경에서 더 잘 철저히 보존된다"
고 하였다.
물론 국내의 어떤 공적 지면에서도 이에 대한 비판은 없었고 오히려 지식인들은 다투어 그 변경문화론에 부응하는 글들을 여럿 올린것을 읽었다.
<질문1>
과연 한국의 역사문화의 본질은 동아시아의 변경적인 것인가?
나는 할말을 잃을 수 밖에 없다....
참고기사들
[동아일보 2001-11-06 18:49] 2년전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저서로 논란을 일으켰던 상명대 김경일 교수(중어중문학·43)가 ‘나는 오랑캐가 그립다’(바다출판사)라는 새 저서를 출간했다. 이 책은 우리 민족이 세계화 시대에서 살아남으려면 ‘오랑캐 정신’을 새로운 삶의 패러다임으로 삼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김 교수는 이 책에서 “21세기라는 거대함 앞에 선 한국은 모든 문화적정치적 허황됨을 버려야 한다”면서 “그 대신 변방 국가로서 ‘오랑캐 정신’을 내세워 생존 전략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교수가 말하는 ‘오랑캐 정신’이란 ‘거대한 힘의 곁에서 살아남은 변방 문화의 에너지’이고 ‘거대함 곁에 있지만 결코 주눅들지 않으며 강인하고 끈질긴생명력을 갖춘 힘’이다. 1999년 봄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를 통해 김 교수가 도전적인 유교문화 비판에 나섰을 때 김 교수는 지식인 사회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한편으로 호의적인 반응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논쟁 과정에서 스스로 부담스러워 했던 그는 그해 여름 미국 워싱턴대에 방문교수로 떠났다. 미국에 머문 지난 2년 동안 그는 자신의 전공인 동아시아 고대 문자 연구에 몰두하는 한편 상당 기간을 이 책을 집필하는 데 썼다. 지난 8월 귀국한 그는 이 책을 펴낸 취지에 대해 “우리 민족은 강대국틈새에서 21세기의 생존 전략을 모색해야할 시점인데도 민족주의적 우월감, 문화적 우월감에 지나치게 사로잡혀 있다”면서 “21세기를 살아가야할 아이들을 위해서 또 한번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한다.그는 “우리 민족은 국경과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으며 중원과 러시아,한반도 일대에서 자신들의 삶을 마음껏 펼쳤던 변방 오랑캐들의 문화적 혈통적 아들”이라고 주장했다. 21세기 세계화 시대에 필요한 것은 바로 이 오랑캐들의 생존술인 ‘다문화’와 ‘이중 언어’라는 것이다. 한민족의 문화에 대한 그릇된 자존심을 버리고 다문화 시대에 능동적으로 대응하자는 그의 주장은 영어 공용화에 대한 적극적인 찬동으로 이어진다. 한반도의 경계를 넘나드는 뛰어난 담판가나 전략가, 장사꾼들을 길러내려면 한 나라가 두 세 개의 문화나 언어를 수용할 수 있다는 열린 생각을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영어가 한국어를 죽이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 대해서는 “이미 우리말에는 타 언어들이 들어와 실제로 단어 겸용을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한국 문화와 한국어의 자존심을 포기한다면 한국인의 정체성은 어디서 찾겠냐는 질문에 대해, “정체성이란 사람의 삶을 가장 인간답게 만들고 사회를 힘있게 만들 수 있는 것이지, 정체성을 정해 두고 이에 맞추려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한다. 변방 오랑캐의 정신으로 21세기를 승부하자는 김 교수의 이번 주장도 이전의 저서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처럼 논란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예상된다. <김형찬기자>khc@donga.com [조선일보 2003-07-14 20:33] 해외를 나가보면 즉각 느끼게 되는 것이 우리나라의 위상이 높아져 있다는 사실이다. 현대자동차·삼성전자·LG가전제품의 입간판이 외국의 대도시에 설치된 것을 보면 눈길이 사뭇 그쪽으로 가며 한국인의 자부심 같은 것이 일어난다.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상이 높아진 것은 박물관에도 그대로 나타나 있다. 3∼4년 전만 하더라도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뮤지움, 런던의 대영 박물관, 파리의 기메박물관엔 한국실이 없었다. 중국실·일본실은 별관을 꾸며 동방의 문화대국임을 자랑하고 있을 때 한국의 유물들은 복도와 계단 한쪽 허름한 진열장 속에서 풀이 죽은 채 누워 있었다. 그 초라함이란! 최근 국제교류재단이 삼성문화재단·한빛문화재단의 지원을 열어 세계 3대 박물관이 어엿한 한국실을 갖게 한 것은 우리나라 문화 외교의 가장 빛나는 업적이라고 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서 새로 일어났다. 한국실이 있으면 무얼하는가. 사실상 세계 3대 박물관의 한국 유물 컬렉션은 몇몇 점을 제외하고는 빈약한 것이다. 자칫 하다간 한국문화의 우수성을 알리기는커녕 변방문화로 치부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걱정은 우리도 우리지만 그곳 박물관 관계자들이 더 큰 것이었다. 즉, 대영박물관의 한국실 유물들이 약하다는 것은 대영박물관의 수치이기도 한 것이다. 마침 최근 대영박물관은 베링거 잉겔하임의 한광호 회장으로부터 한국 유물을 구입하여 보완하라는 조건으로 100만파운드(약 16억원)를 기부받았다. 대영박물관은 이 기금으로 영국의 유명한 도예가 버나드 리치(1887~1979)가 소장하고 있던 18세기 조선백자 달항아리를 영국의 한 경매에서 구입했다. 이 사실은 최근에 발간된 ‘대영박물관 250년사’라는 책에 대대적으로 소개되어 있다. 나는 이것이 보고 싶어 얼마 전 런던에 잠깐 들렀다. 높이 47㎝의 이 거대한 달항아리는 한국실 한쪽에서 넉넉한 한국인의 마음을 흐뭇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여타의 한국 미술품들은 보기 민망할 정도로 빈약했다. 나는 대영박물관의 한국미술 담당 큐레이터인 제인 포탈을 만나 내 소감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그러자 그녀는 유물창고로 나를 안내해 소장품 전체를 보여주며 무엇을 더 전시하라는 것이냐고 되물었다. 그리곤 한국은 왜 그렇게 문화적으로 폐쇄적이냐고 오히려 항의했다. 자신들은 한국실을 빛내주기 위해 좋은 한국 유물을 구입하려고 노력하지만 한국에서는 문화재 해외반출이 금지되어 사올 수 없고 지금 일본과 구미의 고미술시장에서 구하자니 질이 좋은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놓고 대영 박물관을 흉볼 수 있냐는 것이다. 우리는 일제시대에 문화재가 약탈당한 억울한 역사를 안고 있기 때문에 해외에 있는 문화재만 보면 거의 조건반사식으로 환수해 와야 한다는 생각이 들고, 문화재 해외반출은 무조건 막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마음을 열고 이성적으로 대처할 때가 되었다. 그것이 국보·보물 같은 중요 문화재가 아니라면 외국 박물관이 구입해서 한국실에 진열할 수 있도록 허가해 주어야 한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같은 유물이라도 인사동 가게 진열장에 있는 것보다는 대영박물관 한국실에 놓이는 것이 천 배 만 배 가치있는 것이다. 가야토기를 영국인이 사간들 그것은 영국유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가야토기인 것이다. 더욱이 그것을 구입해서 박물관 한국실을 빛내주겠다는데 기증은 못할 망정 못하게 막는단 말인가. 법이란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마련한 장치일 뿐이다. 그것이 세월의 변화에 맞지 않아 오히려 장애가 될 때는 과감히 수정하는 것이 현명한 사회이고 또 법의 생리인 것이다. 이제 문화재보호법은 하루바삐 개정해야만 한다. 물론 도굴·도난 문화재의 밀반출 행위를 엄벌에 처하는 것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다. (유홍준 명지대 교수·미술사가)
[한국사속의 만주]9. 조선, 華夷觀을 넘어 | |||||||||||||
[경향신문 2004-03-03 19:14] | |||||||||||||
“뛰어난 신하와 용맹한 장수들은 병력을 다루는 재주가 있었고, 병졸들은 모두 솔선하여 윗사람을 위해 죽으려 했기에 고구려가 변방의 소국이었으면서도 천하의 백만대군을 두 번이나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신라, 백제, 고구려를 합쳐 한 나라가 되었으니 물산이 많고 재물이 넉넉하며, 군사는 충성스러우며, 유능한 선비는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위의 문답 내용 가운데 흥미로운 것은 당시 명나라 관리들이 고구려와 조선을 동일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최부 또한 고구려의 역사를 자랑스럽게 인식하고, 조선이 ‘고구려의 후예’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드러내고 있다.
조선시대에도 이처럼 고구려는 민족적 자부심의 원천이었다. 특히 조선 전기의 왕이나 관인들의 고구려에 대한 애정은 두드러졌다. 세종은 ‘신라 시조에게만 제사하자’는 주장을 물리치고 평양에 고구려의 시조를 모시는 묘사(廟祠)를 건립하고, 제사 의식을 정비토록 했다. 세조는 동명왕을 모신 사당에 나아가 친히 제사를 올리고, 수와 당이 국력을 기울여 침략했음에도 이를 물리쳤던 고구려의 ‘무용담’을 책으로 엮어 무신들을 교육시킬 것을 강조했다.
조선 전기에 나타나는 고구려에 대한 자부심은 ‘고구려의 고토’인 요동에 대한 은근한 관심과도 맞물려 있는 것이었다. 한 예로 연산군대 영의정 한치형(韓致亨) 등은 압록강부터 요하(遼河)에 이르는 땅에 살고 있는 주민들을 모두 ‘우리나라 사람’이라고 인식하고 있을 정도였다.
명은 조선을 ‘고구려의 후예’로 인식하면서도 조선이 ‘고구려의 고토’에 대해 영토적 야심을 가질까봐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명 조정은 일찍이 조선의 개국공신 정도전(鄭道傳)을, 요동에 대한 영토적 야심을 가진 인물로 지목하여 제거하려고 했다. 뿐만 아니라 15세기 초반에는, 조선 조정이 두만강 접경에 살고 있는 여진족을 회유하는 것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이를 중단하라고 협박을 가하기도 했다. 심지어 명의 관인들 가운데는 임진왜란을, 조선이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기 위해 ‘일본군을 끌어들여 일으킨 전쟁’이라고 왜곡하여 인식하는 인물도 있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고구려에 대한 인식은 조선 전기와는 다른 차원으로 전개되었다. 왜란 당시 조선에 참전했던 명군 지휘관들 가운데는 ‘군사 강국 고구려의 후예인 조선이 무슨 이유로 이렇게 쇠약해졌느냐?’고 의문을 표시하는 인물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들은 고구려와 달리, 조선이 ‘문약(文弱)’에 빠졌기 때문에 일본의 침략을 부르고 결국에는 나락으로 떨어졌다고 나름대로 ‘진단’을 내리는 경우도 있었다.
실제로 왜란과 호란 이후 조선의 고구려, 나아가 만주에 대한 관심은 조선 전기에 비해 약화되는 조짐을 보인다. ‘야만족’이라고 멸시했던 만주족의 청에 병자호란을 통해 굴복하고, 이후 그들의 압박 때문에 국체(國體)를 유지하기에도 급급한 상황에서 고구려나 만주에 대한 관심을 드러낼 여유가 없었다. 특히 청이 만주지역을 자신들 ‘선조의 발상지’라고 신성시하고, 조선인들이 압록강이나 두만강을 건너 유입되는 것을 엄금하면서부터 조선은 더욱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호란이 남긴 상처가 어느 정도 치유되고, 사회경제적으로 안정을 되찾은 17세기 후반 이후 고구려와 그 강역에 대한 관심은 되살아난다. 숙종은 신하들을 접견한 자리에서 ‘살수대첩’의 고사를 떠올리며 ‘병자호란의 치욕’을 회고하는가 하면 을지문덕을 모신 사우에 예관을 보내 제사를 올렸다. 영조는 동명왕릉을 수축하라고 지시하고, 자신이 직접 제문을 지어 제사를 올렸다.
숙종대에는 이전까지 청의 엄중한 감시 때문에 방치되었던 두만강 유역의 국경 지방을 정비하는 사업이 시작되었다. 이 무렵 조선은, 베이징에 수도를 두고 중원을 차지하고 있는 청이 언젠가는 멸망하여 만주로 복귀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하고 있었다. 국경 정비사업은 그에 대비한 포석이기도 했다. 남구만(南九萬) 같은 이는 더 나아가 두만강 이북 지역(오늘날 간도에 해당)을 ‘이성계(李成桂) 선조들의 고향’이자 조선왕조를 있게 만든 ‘근원의 땅’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이같은 인식을 바탕으로 ‘고구려의 고토’인 요동과 더불어 두만강 이북지역을 언젠가는 회복해야 한다는 생각을 피력하기도 했다.
1712년 백두산 정계비를 세우고 양국의 경계가 정해졌지만 남구만 등이 지녔던 의식은 조선 말기까지 면면히 이어졌다. 실제로 만주족의 청이 중원을 차지하고 있는 동안에는 조선과 청 사이에 영토를 둘러싼 논란이 심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19세기 후반, 청이 흔들리고 한족 관료들이 외교 전면에 나서면서부터 ‘간도 문제’ 등이 불거졌던 것이다.
위에서 언급했듯 조선이 만주에 대해 영토적 야심을 가질까봐 두려워했던 것은 중화(中華)를 자처했던 한족 정권인 명이었다. 오늘날 중국이 옌볜 등지의 조선족에게 한국의 영향력이 미치는 것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조선 조정이 여진족을 회유하는 것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던 명의 태도와 대단히 유사하다. ‘동북공정’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요컨대 ‘고구려 역사’를 제대로 지켜내려면 만주를 둘러싼 조선과 명·청의 신경전에 대한 보다 치밀한 역사적 이해가 요구된다고 하겠다.
〈한명기/명지대 사학과 교수〉 |
<필자가(하이안자) 오마이 뉴스에 올린 글의 일부>
현재 한국의 상황인식(1) 취임사의 결구를 재음미한다 | |
[오마이뉴스 2003-03-08 12:42] | |
몇 가지 비유
한국인들이 성숙한 새시대사를 영위할 자각과 용의가 진정 있다면 신경쓰지 않아도 좋을 일이 많을 수 있다. 일본 중국의 패권주의 숙원이라든가 미국의 자존심 세우기 혹은 러시아의 장기두기나 유럽 나라들의 은근한 우월주의 같은 것들이 과거에는 눈부시게 또는 넘을 수 없는 높은 산으로 보였지만 이제는 아닐 수 있다. 그러나 타고르가 읊은 '동방의 등불'은 스스로 켜야 빛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목하 내외적으로 '질풍의 격랑 끝에 놓여있는 배에 동승한 바다 여행자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목적지는 물론 두고 온 산하 정겨운 고향이다. 귀향선을 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방향을 개혁이라고 부를 수 있어야 한다. 물리학상 전기의 흐름이 '+'에서 '-'로 흐르지만 전하의 흐름은 그 반대인 것과 같다. 왜 미래를 지향해야할 시대에 귀향선을 탑승할 수밖에 없는가? 우리가 모든 삶의 가치를 스스로 결단하기 위해서이다.
맹자는 "기준이 없다면 한 치의 나무토막이 높은 누각보다 높게 할 수도 있다"고 하였다. 모든 가치판단의 준거를 가지런히 하고서야 비로소 우리가 지향하는 어떤 목표가 진정 귀한 가치가 있는지를 변별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껏 우리는 아마도 허공에 정밀한 자를 대고 수없이 높이를 재보고 '우리 것'은 항상 '남의 것 보다 못하다'고 생각해왔던 것 같다. 그래서 조급했고 민감했고 술을 많이 마셨고 소리를 질렀고 남의 탓을 하였고 사실은 공연히 뛰어다녔다. 그러나 꼭 언제나 그래야 할 일은 전연 아니었다. 그러나 열심히 일했다. 고생을 피하려 하지 않았었다. 무언가 꼭 성취해야한다고 믿었다. 그 의지로 삶을 압박하는 모든 권위에 힘차게 도전하였었고 시민의 힘을 키울 수 있었다. 그 발전하고 있다는 의식과 믿음이 너무도 강했기에 피로마저 즐겼었고 정치인들이 거짓으로라도 "국민의 뜻을 겸허히 받아들인다"고만 하면 얼마만큼은 화가 풀리는 정도였다.(지금이야 물론 아니다)
90년대 이후 삶이 조금 여유롭게 되자 그들은 허전했다. 그리고 그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왜 그런지를 진정 몰랐다. 그래서 나온 것이 '인생의 여유를 즐기 자'는 '마이카 붐'으로 대표되는 현상이다. 그 유행이 들불처럼 빠르게 일어난 힘은 그러나 알고 보면 바로 뜬금 없고 기준 없는 허전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전문가들이 말하기를 '지금은 지식산업화 시대에 접어들었다. 새로운 발상과 아이디어 지식이 전통적 생산체제의 위력을 압도할 것이다. 그런데 새로운 창조적 사유를 위해서는 '놀이'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과거의 '노세노세'는 피로를 풀고 삶의 애환을 카타르시스하는 소박한 것이었다. 지금의 '레저'란 조금은 현실을 지나치게 앞서가고 있다. 서양인들이 '너무 일직 샴페인들 터트렸다'는 말이 어느 정도는 시기에 찬 말일 것이나 사실성이 있다.
한국은 역사상 사실은 (1)너무 이상지향적이었고 (2)특히 정치제도는 다소 너무 앞서갔었다고 분석할 수도 있다. 잠시 필요하니까 이 이야기를 좀더 해 두어야 하겠다.(이는 반드시 역사학적 결론은 아니며 오히려 사상사적 판단임을 전제한다)
역사
가) 삼국건국사(백제의 예)
대개 고조선 부여왕조 까지는 동북아시아에서 중국과 북방민족과 직접 교섭하는 살을 살아왔다. 그러나 고구려와 백제와 신라 특히 예를 들어 백제가 바다를 건너 한반도 북부에 정착하였을 때 이곳에는 마한이 있었다. 그들 토착세력과 공존의 방식으로 국가를 출범하고 결국 잠령 포용하였다. 그 주지된 사실을 거론하는 것은 백제 내도인 집단이 고급한 정치제도와 행정기술 물자를 다루고 생산하는 높은 가능 세련된 지식과 사상을 가지고 내도하였다는 사실을 잊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백제의 국가형성이 한참 뒤의 시대로 비정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백제는 건국당시부터 국가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이 고도한 기획능력을 가지고 단시일에 창조한 국가였다.
문제는 그 지도층의 사상과 기술이 토착 백성들 전체의 단계보다 앞서 있었다는 데 있었다. 이른바 상하불균형의 시작이었다. 국가 이상이 앞서가기 시작한 것이었다.(최근 백제가 투쟁과정에서 우연히 망하였다는 학설은 그래서 제기된 측면이 있다)
여담이 되겠지만 백제가 신라에 의해 통합된 이유는 의외로 높은 외교적 식견와 이해력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나당 연합군이 사비성 밖에 진격해왔을 때까지도 백제는 당나라의 의지가 <백제국가의 멸망을 의도하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오판이 빗나갔던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자신들의 군사력에 대한 자신감 때문이었다. 최후의 방어작전회의에서 지형을 이용한 수세적 방어전략은 대담하게 포기되었고 진공작전이 결행된 것이 그것이다.
백제 부흥운동 과정에서도 그러한 오류는 반복되었었다. 그랬으므로 동아시아 역사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20년 정도의 부흥운동을 전개할 힘이 있었음에도 결국 신라에게 패멸하였던 것이다. (물론 그 과정 자체가 민족 통합의 역사에서 가지는 의미는 논외로 하고)
나)제도사
후삼국 태봉에서 중국식 괸제를 받아들인 이래 한국은 대륙 중국의 세련된 정치제도와 기법을 수용하고 발전시켰다. 960만 평방제곱미터가 넘는 광대한 중국에서 다민족의 통일을 이루는 것은 1)사해동포주의에 기초한 이상주의 정신 2)잘 짜여진 정치제도와 황제 관료제도 3)막강한 군사력에 의해서였다. 그 제도를 수용하고 발전시킨 역대 한국의 왕조들은 자연 높은 정치적 이상과 식견을 중심으로 하였다. 그러나 자신들 내부의 사회발전의 흐름을 중심적으로 반영하는 제도의 창출이 비교적 소극적이었다고 평가된다.(물론 중국에서도 각 단계 역사에 심각한 모순이 있었고 그 모순들이 완결되지는 못하였으니 내부모순에 대한 대응의 역사로서는 손색이 없었다) 물론 사상사에도 마찬가지였다고 생각된다.
제도와 사상의 앞서가는 지성과 경험의 구축은 한국사회 문화의 발전을 매우 빠르고 수준높게 해주었다.
이상의 고대사의 예는 한국 역사가 '이상주의'를 중심으로 너무 고상한 지향성을 그 한 특징을 지적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주지하듯 조선왕조시대는 그 절정을 이루었다고 생각된다. 이상을 귀중한 것이나 현실과 조응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그것은 한국 토착사회의 발전의 정도가 중국에 비해 전면적으로 후진적이었다는 뜻은 전연 아니다. 오히려 중국은 동북아시아에서 생성된 높은 정신 가치를 수용하였으되 고대이래 제국주의적인 사상의 굴레로 그 편협함으로 말미암아 그들 역사의 기초적 힘인 보편적 가치성을 감쇄한 것이 역사상 부정적 작용을 하였었다. 한국은 그 반대였다. 너무 보편적 이상주의적 이었다)
현재의 파고를 보며
삼국의 정립 이전부터 한국사 초기는 역시 이상주의적이었다. 삼국시대에 이르기 오랜 전부터 '군자불사지국'으로서 오랜 정신적 삶을 영위해왔다. 예를 들어 동북아시아 사상사의 중국적 정형인 중국유학의 수입은 기존의 연구결과보다 빨라서 고구려 초에 이미 지배층이 경전을 능숙히 구사하고 있었다. 고구려는 기질적으로 용감한 나라가 아니고 확고한 정신과 의지로 강건한 나라였다. 이상이란 영원히 귀중한 가치이다. 그러나 그 이상의 구현은 나라의 크기 국민의 정서 환경 관습 그리고 국민성 등에 따라 극히 다양한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또 힘이 강하고 광대한 큰 국가를 이루고 나서만이 가장 수준 높은 이상을 발견하고 구현할 수 있는 것은 전연 아니다. 중급크기의 한국이 소국적 열등감을 가질 필요는 없는 것이다. (도시국가 그리이스가 세운 정신은 서양을 영원히 지배할 것이다.)
현재의 한국적 상황을 '질풍노도의 청소년기적 단계'로 이해할 수는 없다. 현재 한국의 흔들리는 불안정한 여러 전반적 양상은 오히려 (1)역사상 오랜 이상주의의 여파 (2)그 전통적 이념에 기초하여 나타난 근대적 이상 추구에 대한 절대적 가치부여 (3)이상과 현실의 괴리에 대한 확대된 해석과 지나친 자기비하 등에 기인한다고 생각된다. '성숙해야할 년배에서의' 이상적 흔들림이므로 진정 문제가 되는 것이다. 과거 프랑스 문부상의 지적대로 한국은 원래 문화적으로 후진국이 아니었다. 성숙한 국가 단계를 이미 장시간 영위해왔던 것이다.
율곡 선생님은 격몽요결에서 학생들에게 제일먼저 "자신이 성인이 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자존심"을 가지라고 가르쳤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의식 속에 "내가 성인이야 될 수 있나?", "나같은 세속적인 사람이야..."라고하는 자신의 인격에 대한 무의식적인 자기비하가 근본적으로 고상하고 발전된 인격을 도야하는 것을 가로막는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우리도 흔히 그러 인식을 국민생활 속에서 일상으로 본다. 예를 들어 '은근과 끈기의 민족' '한이 묻어나는 한국문화"(최근에 일본에서 한국 가요를 방송한다는 사람이 그 이유를 묻자 한국의 가요에는 절실한 한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고 하였다.
한이 왜 좋은가. 대체 한이라는 애수적 개념이 한국문화의 코드가 될 수 있는가 묻고싶다. 그것은 아마도 적어도 '한'을 넘어서는 그 무엇이다.) 스스로의 인격과 가능성에 대한 진지한 자신감이 필요하다. 자신감이 있다면 조급하거나(솔직이 나 지신도 그러하다) 어느방향으로든 '오바'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취임사의 결구
현재는 우리 상황에 대해 깊은 성찰을 수행해야만 할 때인 것만을 확실하다. 신임대통령의 취임사에서 동북아시아(한국을 중심으로 말한 것)는 세계의 변방이었다는 이해에 기초하여
(1)"오랜 세월동안 우리는 변방의 역사를살아 왔습니다" (2)"때로는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의존의 역사를 강요받기도 하였습니다." (3)"그러나 이제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습니다." (4)"21세기 동북아시아 중심국가로 웅비할 기회를 맞고 있습니다." 라고 취임사의 대미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 글을 읽고 한마디로 탄식하였다.
아마 취임사 기초위원님들의 글의 의도는 우리의 현재의 상황을 절실히 묘사하려는 이유에서였을 거라고 이해될 수는 있다. 그러나 도대체 지구상의 어떤 유구한 문화와 역사를 가진 한 민족이 자신의 역사를 '변방'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가? 동아시아의 경우 일본이라면 그런 표현을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한국은 그 표현이 전연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오래 변방으로 살아온 나라라면 지금과 같은 근대사의 압축적 성장을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나는 그 (1)번 글은 다음과 같이 수정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너무 '겸손한 자기인식'은 중심국가 도약의 용기와 어울리지 않는다.
"유구한 한민족의 청사에서 우리조상들은 동아시아의 중심국가를 건설하였었습니다. 중국문화와 교류하고 다른 나라과 교섭하면서 서로의 단점을 보완하고 서로 성장하도록 수혈하고 자극하였습니다. 동아시아 문명권의 가장 위대한 성과의 한 주축이었습니다."
"그러나 근대사가 열리는 시점에서 그 세계적인 격랑 속에서 영광은 일시에 무너졌습니다. 광범한 세계이성 좌절로 바로 그 해독으로 우리는 크나큰 삶의 고난을 경험했고 자신감이 흔들리는 자아의 모습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오랜 문화유전으로 전통화된 민족혼이 있어 웅대한 기백과 굳은 의지로 오늘의 성과를 이루었습니다."
"지금은 그 높았던 자신감과 자아를 찾아야 할 때입니다. 새로운 동아시아의 중심국으로 그리고 당연히 세계의 중심국으로 차원을 높여 자리를 찾아 돌아가야 할 때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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