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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ther things/미셀러니

Ace Of Sorrow-Joan Baez

하이안자 2004. 5. 21. 21:17

Ace Of Sorrow-Joan Baez

 

장미, rose, love

 

 

 

 

 

 

고병익 선생님 영전에 바칩니다

 

 

 

 

 

오늘 불의에
별세하신 소식을 접하였습니다.
언제나 마음으로나마 
든든하게 모시던 선생님의 부음은
너무나 놀랍고 안타깝습니다.

 

 

최근 동아시아학술원에서 식민지 근대화론을 비판하시던 의연하신 말씀이 아직 생생합니다. 벌써 여러 해 전 잠시 가르침을 받았던 동아시아근대사 강의말씀도 생생합니다. 선생님의 학문의 그 깊이를 그 당시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만 그 후 두고두고 제 분야를 공부하면서  선생님의 선구적 저술인 아시아의 역사상, 동아사의 전통, 동아시아의 전통과 근대사, 그리고 선생님의 기념논문집 등을 모셔두고 지남으로 삼았었습니다.

 

그보다도 저는 선생님의 깊은 제자사랑 , 학문하는 자를 아끼시는 드넓으신  따스한 인애를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용기를 주시던 말씀 아직도 저의 즐거움입니다. 1990년이었던가요? 중국공자학회에서 한국을 대표하여 유교의 정신을 발표하실 때는 저의 소론과 공감하는 부분을 언급하셔서 기쁘고 자랑스러웠습니다. 바로 간언의 역사에 대한 말씀은 동아시아 사상사의 기능을 재성찰 할 수 있는 중요한 포인트였습니다. 뵙지 못했던 여러 해 사이 어느새 선생님은 저에게 뵐 기회를 남겨두시지 않으셨군요.

 

그러나 사람의 생이 어찌 영원하겠으며 영원하지 못함이 어찌 대수이겠습니까? 제 안에서 길이 모시고 받들겠습니다. 새로운 우주에서 오직 신령하신 정으로 영원히 통달의 길을 가시리라 믿습니다. 저는 오늘에야 저에게 내내 붙어 다닌 아라비아 숫자 1과 9와 3의 의미를 알 것 같습니다. 생사의 초월과 은혜의 깊음을 말하는 신탁이었습니다. 음력 3월은 선생님과 같은 하늘을 이고 산 기쁨의 세월이었습니다. 양력 19일은 선생님과 석별하는 슬픔의 날이었습니다. 윤 삼월 지나시고 사월 초하루에 영면하시니 이 역시 합치합니다. 선생님의 은혜를 그 덕음을 잊지 말라는 의미였다고 이제야 알겠습니다. 길이 길이 안식하소서.

 

 

 

 

 

 

渾然恕情安體仁


建順中和性之義


深惠遠施通達忠


敦厚文彩嚴立信


窮究平生唯一敬


敎化世上不二誠


小大門徒永懷德

 

 

 

 

2004년 5월 20일

 


夏夷案子  兪 德 朝   哭 輓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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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아탑 밖에서도 빛난 동양사학계의 '거인'
[조선일보 2004-05-20 04:46]
19일 별세한 고병익 前서울대총장

[조선일보 이선민 기자] 19일 세상을 떠난 고병익(高柄翊) 전 서울대 총장은 광복 후 교육받은 역사학자로 동양사학계의 거인이었으며, 폭 넓은 사회 활동을 펼친 우리 사회의 원로였다.

역사학자로서 고병익 박사가 특히 관심을 기울였던 분야는 동아시아의 역사와 문화전통, 그 상호 관계와 교류, 그리고 근대 이후의 변화상이었다. 동양사를 하려면 언어가 무기가 되어야한다고 주장했던 그는 일본어와 중국어는 물론 독일어 영어에 능했다.

‘동아교섭사(東亞交涉史)의 연구’(1970) ‘동아시아의 전통과 근대사’(1984) ‘동아시아의 전통과 변용’(1996) 등 저서는 그의 학문이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성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동아교섭사의 연구’는 당시까지 중국에 머물던 우리 동양사학의 연구 대상을 일본과 중앙아시아를 포함하는 동아시아 전체로 넓힌 역저로 평가되며, 그에게 학술원상 저작상을 안겨주었다.

고 박사는 서울대 문리대 학장(1970~74) 부총장(1977~1979)을 거쳐, 79~80년 유신체제가 무너지고 제5공화국이 들어서던 격동기에 서울대 총장을 지냈다. 학내외의 격동을 온 몸으로 겪었던 그는 캠퍼스 분위기가 살벌하던 시절에도 잔디밭에서 담배를 피우는 학생에게 부드럽게 말을 건네 “나오라”고 할 수 있는 총장이었다.

 

고 박사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장(1980~82)을 거쳐 1982년 한림대 교수로 학계로 돌아왔다. 그는 방송위원장(1991~93년)이란 중책을 맡아 방송 정책을 총괄하면서 남다른 조정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경북 문경에서 태어난 고 박사는 휘문고를 졸업한 후 1943년 도쿄(東京)대 동양사학과에 입학했다가 전쟁으로 학업을 중단했다. 광복 이듬해 서울대 사학과에 들어가 1947년 제1회로 졸업한 그의 동기생으로 이기백(李基白)·전해종(全海宗) 전 서강대 교수 등이 있다. 독일 뮌헨대에 유학, 동양학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1962년부터 모교인 서울대 사학과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연구와 교육에 몰두했다.

 

고 박사는 문화재와 고전 업무와도 깊은 인연을 맺었다. 1997년 ‘문화유산의 해’ 조직위원장을 맡은데 이어 우리나라 문화재 분야의 최고 권위 기구인 문화재위원회 위원장(1997~2001), 국제유적협의회(ICOMOS) 한국위원장(1999~2001)등도 역임했다. 또 1994년부터 한국 고전 국역(國譯)을 담당하는 민족문화추진회 이사장을 맡아왔다.

 

고병익 박사는 마지막 순간까지 학문을 놓지 않았다. 작고하기 직전까지 평생 연구 성과를 정리한 400쪽이 넘는 영어논문집 ‘동아시아 문화전통과 역사(Essays on East Asian Cultural Tradition and History)’를 탈고하고 색인 작업을 하는 중이었다. 제자인 서울대 동양사학과 김용덕(金容德) 교수는 “고 박사는 역사학이 상아탑 속에 갇혀 있지 말고 대중과 함께하며 사회적 요청에도 부응해야 한다고 주장하셨다”고 말했다.

 

(이선민기자 smlee@chosun.com )

 

 

 

 

 

 

故고병익 선생님 영전에…동양사학계 황량함 채운 ‘큰 나무’

[동아일보 2004-05-20 18:46]

 

[동아일보]

 

 

 

“고병익 선생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전화기 저편 조교의 다급한 목소리를 듣고 망연자실. 달리던 차를 세우니 빛나는 신록을 배경으로 모를 심고 있는 농부들이 멀리 보였다. 문득 선생님의 아호 운인(芸人)이 떠올랐다. ‘김을 매는 사람’. 이 논의 모들은 저 농부들이 여름 내내 김을 매어 주어 가을이면 좋은 결실을 보리라. 그러나 이제 운인 선생님이 돌아가셨으니 우리를 위하여 누가 다시 김을 매어줄 것인가?

필자가 선생님께 처음 가르침을 받기 시작한 것은 선생님께서 마흔을 갓 넘기셨던 소장 학자 시절이었다. 그러나 여든을 맞으신 올해까지 근 40년 동안 선생님께서 달라지셨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심지어 선생님이 늙어 가신다는 엄연한 사실도 느끼지 못한 것 같다. 그것은 선생님이 40년 전 이미 일가를 이룬 대학자이고 계속 왕성하고 정력적인 모습으로 동양사학계를 선도하셨을 뿐 아니라,

교육계 언론계 등 우리나라 문화계 전체에 커다란 족적을 남기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항상 선생님의 뒤를 좇아 가려고 노력했지만, 선생님은 우리가 대학 1학년 시절에 느꼈던 것보다 더 멀리 우뚝 서 계셨다. 필자는 동숭동 시절 서울대 문리대 연구실에서 낡은 스웨터를 입고 파이프 담배 향을 뿜으시던 선생님의 모습을 정말 좋아했다. 그러나 선생님의 학문의 깊이와 폭은 보다 넓고 높은 경륜으로 이어졌다. 실로 선생님은 공자가 말한 “학문에 여유가 있으면 벼슬을 한다(學而優則仕)”는 경지에 이르셨고, 그 결과 우리는 정말 보기 드문 ‘문화계의 거목’을 가질 수 있었다.

선생님을 아는 사람은 모두 선생님의 박학과 식견, 그리고 풍부하고 여유 있는 유머에 감탄했고, 한국에도 이 같은 큰 인물이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 사회는 선생님의 그 높은 경륜이 충분히 실현될 수 있는 조건이 되지 못했다. 그래도 선생님은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하셨고, 한발 앞서 세계의 변화를 감지하시고 자신의 역할을 찾으셨다.

바로 이런 선생님이 계셨기 때문에 오늘 날 한국 동양사학과 역사학의 수준이 이나마 유지됐고, 우리 문화계의 황량함이 조금이나마 덜어졌다는 것은 비단 필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 거목을 잃었다. 선생님의 서거를 슬퍼하기에 앞서 두려움이 앞선다. 그래도 선생님, 이제는 편안히 가십시오. 우리는 선생님의 실천적 교훈과 커다란 유산을 되새기며 선생님의 큰 그릇에 조금이나마 다가가겠습니다.

 

 

이성규 서울대 교수·동양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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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약

한국의 역사학자.

출생지 : 경북 문경
활동분야 : 역사학
호 : 녹촌
주요수상 : 위암 장지연상(1996), 금관문화훈장(1997)



 본문

    1924년 경상북도 문경()에서 출생하였다. 호 녹촌(鹿). 중학을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가 1941년 후쿠오카[]고등학교에 들어갔다. 1943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도쿄대학교 동양사학과에 입학하였다. 광복 후 귀국하여 1947년 서울대학에서 학사 학위를 받고, 다음해인 1948년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강사가 되었다. 1953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동양사 석사 학위를 받고 1954년 독일로 유학, 1956년 뮌헨의 루트비히막시밀리안대학교 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귀국한 후인 1957년부터 역사학회 대표를 맡았고, 1958년 연세대학교 교수로 임용되었다. 그해부터 1962년까지 조선일보 논설위원을 지냈다. 1960년 동국대학 교수를 거쳐, 1962년 서울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1966년부터 1968년까지 미국 워싱턴대학교에서 객원교수를 지내고 귀국하여 1970년 서울대학교 문리대 학장으로 임명되었다. 1977년 서울대학교 부총장이 되고, 1979년 5월부터 1980년 6월까지 제14대 서울대학교 총장을 지냈다. 1963년부터 1970년까지 역사학회·동양사학회 회장을 지내고, 1973년부터 1994년 사이에 국사편찬위원회와 문화재위원회의 위원과 도산서원()의 원장을 맡는 등 한국 사학계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또, 1976년부터 1980년까지 한국사회과학협의회 회장을 지내고 1980년부터 2년 동안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의 원장을 맡았다.

    이 밖에도 1987년과 1991년 두 차례에 걸쳐 방송위원회 위원장을 맡았고, 1988년에는 21세기한일위원회 위원장과 민주화합추진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하는 등 사회 각 분야에서의 활동도 활발하였다.
    현재 학술원 회원·유네스코본부 실크로드 자문위원·교육정책자문회의 위원·민족문화추진회 제7대 이사장·실크로드 한국위원회 위원장·국제기념물 및 유적협의회(ICOMOS) 한국위원회 위원장·문화관광부 문화재위원회 위원장 등 많은 직책을 맡고 있다.

    저서에 《아시아의 역사상()》(1969), 《동아교섭사의 연구》(1970), 《혜초의 길 따라》(1984), 《동아시아사의 전통과 변용》(1997) 등이 있고, 수필집으로 《망원경》(1974)과 《선비와 지식인》(1985) 등이 있다.

    1974년 학술원 저작상을 받았고, 1996년 한국학 부문에서 제7회 위암 장지연상을 수상하였으며, 1997년 문화유산 보호 선양에 기여한 공로로 금관 문화훈장을 받았다.

     

     

     

     

     

     

     



    6080세대 “마지막 지혜까지 환원”
    원로들의 문화 사랑방 ‘태평관 기숙당’ … 민간 차원 최초 귀중한 지적 재생산 場

    서울 서소문 명지빌딩 20층에 마련된 원로들의 문화 사랑방에서 첫 모임을 가진 태평관 기숙당 회원들. 학계·문화예술계 원로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2002년 12월23일 서울 서소문동 명지빌딩 20층에 학계, 문화계 원로 20여명이 모였다. 명지학원(이사장 유영구)측이 이 신축빌딩에 ‘태평관 기숙당’(太平館 耆宿堂·이하 태평관)이라는 문화 사랑방을 마련하고 각계 원로들을 초청한 것이다. 명지빌딩 자리가 원래 조선 전기 명나라 사절들이 머물던 공관 ‘태평관’이었는데, ‘덕망과 경험이 많은 노인’들이 모이는 장소라 해서 ‘기숙당’을 보탰다. 사랑방 회원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학계와 문화계 거목 27명이다.

    언뜻 보면 전직 총리와 장관들(정원식·이영덕·이현재 이상 총리, 조순 부총리, 서명원·권이혁·조완규 이상 교육부 장관, 이어령 문화부 장관)의 모임이거나, 학술원 회원 혹은 전직 대학총장들(김준엽 고려대, 고병익 서울대, 정범모 한림대, 이현재 서울대, 이영덕 명지대) 모임 같기도 하다. 그러나 분야별로 보면 문학(이우성·이어령·여석기), 역사학(고병익·김준엽·이기백·차하순), 철학(김태길), 한문학(조남권), 신학(최석우·한철하), 의학(권이혁), 경제학(조순), 자연과학(조완규), 교육학(이영덕·정원식·서명원·정범모), 환경(박영숙), 미술(권옥연), 음악(김동진·황병기), 연극(차범석), 영화(유현목), 무용(김백봉) 등 도통 종잡을 수 없는 게 이 모임의 특징이라면 특징. 게다가 1995년 서울시장 후보로 나서 맞대결을 펼친 정원식 전 총리와 조순 전 부총리가 자리를 함께한 것도 눈에 띈다.

    학계·문화계 거목 27명 한자리에

    태평관 모임의 상견례가 있던 날 마침 해외로 연주여행을 떠난 황병기씨와 김준엽, 여석기, 이기백씨 등 4명을 뺀 23명이 마주했다. 모임을 주관한 고병익 교수는 “분야가 달라 처음 인사를 나누게 된 분들도 있다”며 “명지대-LG연암문고가 희귀한 고서적만 모은 게 아니라 원로학자들이 은퇴 후에도 연구하고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었다”고 소개했다. 이어 이어령씨가 “어린 제가 심부름하는 뜻에서 나서게 됐습니다”라고 운을 떼 웃음을 자아낸다. 그도 그럴 것이 이날 황병기씨(67)의 불참으로 새해 계미년에 예순아홉이 되는 이어령씨가 모임의 막내 노릇을 하게 됐다. 최고령자는 구순을 맞는 김동진 경희대 명예교수. 태평관 회원들의 평균연령이 77세니 60대라면 아직 젊은이다.

    모임의 심부름꾼을 자청한 이어령씨와 명지대학의 인연은 6년 전 고서 한 권으로 시작됐다. 명지대는 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18~19세기 해외에서 출간된 한국 관계 고서 찾기 운동을 시작했고, LG연암문화재단이 매년 2억원씩 지원을 약속하면서 운동에 가속이 붙었다. 지금까지 명지대가 LG연암문고라는 이름으로 수집한 자료가 책, 지도, 삽화, 필름을 합쳐 1만여점에 이르는 데다 동주 이용희 선생이 기증한 동주문고(2만8000여점)와 독일 수집가가 기증한 기산 김준근(구한말 화가)의 풍속화 21점 등 해외로부터의 기증 사례도 늘고 있다.

    그 가운데 이어령씨의 손에 들어온 책은 20세기 초 프랑스에서 아돌프 탈라소가 펴낸 ‘아시아의 연시(戀詩) 시화집’이었다. 탈라소는 아시아 28개국의 연시를 골라 책으로 엮었는데 여기에 조선시대 가곡집 ‘남훈태평가’ 3편(꿈, 이별, 눈물)이 수록돼 있었다.

    “책에 대한 해설을 의뢰받은 후 서양의 한국문학 수용과정을 연구하려면 우리 문학만큼이나 외국 문학에 대한 이해도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만큼 시야가 넓어야 한다는 것이죠. 당장 삼경을 사흘밤, 사경을 나흘밤으로 오역한 부분이 눈에 띄지만 오역 자체도 문화적 차이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한국 문학 번역사를 다시 써야 할 만큼 귀중한 이런 자료들을 자유롭게 열람하고 연구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즐겁습니까.” 이어령씨의 말이다.   (계속)

     


     

     



    6080세대 “마지막 지혜까지 환원”
    원로들의 문화 사랑방 ‘태평관 기숙당’ … 민간 차원 최초 귀중한 지적 재생산 場

    해외에서 출간된 한국 관계 고서 4만여점을 보유하고 있는 명지대-LG연암문고의 개가식 도서관.

    고병익 교수도 문화재위원장으로 LG연암문고가 입수한 고서들을 검토하면서 명지대와 인연을 맺고 2001년 명지대 석좌교수가 됐다. 그는 국내 동양사의 대가이며 유럽 학계에 두터운 인맥을 형성하고 있어 동서양을 아우르는 문화사 연구의 적임자로 꼽힌다.

    한국 관계 고서 찾기 운동이 본궤도에 오르고 18개 언어, 4만여점에 이르는 방대한 자료가 축적되면서 “수집에만 매달리지 말고 연구를 병행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명지대-LG연암문고에는 박태근 상임연구위원(65·관동대 객원교수)과 기록과학대학원의 김찬규 교수(문화재보존관리학) 등 5명의 운영위원이 있으나 자료를 분류하고 목록과 목차를 정리하는 일로도 벅찼다. 박태근 위원은 “젊은 학자들의 경우 나무(전공)만 보지 숲을 보는 능력이 부족하다”며 “이우성, 고병익 선생처럼 시야가 넓고 박식한 원로학자들의 힘을 빌려야 할 때”라고 말한다.

    “학문의 중심은 ‘원전주의’입니다. 하지만 지난 세기 우리의 서지학적 능력으로는 원전에 대한 접근 자체가 어려웠습니다. 중역과 재인용에 만족해야 했죠. 일본에서 네덜란드어로 된 ‘하멜 표류기’가 출간된 것이 1970년대 일인데 우리는 아직까지 일어판, 영어판 중역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드디어 저희 문고에서 17~18세기 유럽에서 출간된 ‘하멜 표류기’ 네덜란드어판, 프랑스어판, 독일어판, 영어판, 덴마크어판을 입수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 땅에 원전주의 학문의 토양이 마련된 것입니다. 해외유학을 통해 외국어에 능통한 젊은 학자들과 원로학자들이 함께 연구하는 지적 재생산의 장을 만들어야 합니다.”박태근 위원의 말이다.

    서고 마련 연구와 휴식 접객까지

    태평관 기숙당 모임을 이끈 고병익 전 서울대 총장(위)과 이어령 전 이화여대 교수.

    명지학원이 신사옥 20층에 2개 층 높이의 공간을 확보해 서고를 마련하고 그 옆에 연구와 휴식, 접객까지 할 수 있는 사랑방을 만들어 학계, 문화계 원로 27명을 모신 데는 이런 깊은 뜻이 깔려 있었다. 이어령씨는 “예술원, 한림원도 있지만 관 조직이 아닌 민간 차원에서 이런 모임을 꾸린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며 의미를 높이 평가한다. “명지대-LG연암문고가 소장한 한국 관련 고서들이 읽고 쓸 사람이 없어 사장되는 일은 막아야 합니다. 원로들에게 그런 일이 주어진다면 웬만한 훈장 하나 받는 것보다 더 즐겁지요.”

    교수에게는 정년이 있어도 학문에는 정년이 없다고 하듯, 태평관 회원 27명은 정년이란 말을 아예 잊고 지낸다. 구순의 1세대 작곡가 김동진 선생이 여전히 제자들과 함께 발표회를 가질 만큼 정력적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한국철학의 태두로 불리는 김태길 서울대 명예교수(83)는 자신이 세운 철학문화연구소로 매일 출퇴근한다. 조남권 한서대 동양고전연구소 소장(75)은 지금도 현장에서 동양고전을 강의하며 고전 국역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예순이 되니 사회에 봉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한문을 가르치기 시작했다”는 그에게 은퇴 운운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올해도 무용가 최승희 기념사업으로 분주했던 김백봉 교수(76), 전시회 준비로 여념이 없는 권옥연 금곡박물관 관장(80), ‘한국사 시민강좌’를 만드는 이기백 서강대 명예교수(79), 세계역사학대회를 준비한 차하순 서강대 명예교수(74) 등 학문과 예술에 대한 원로들의 열정은 끝이 없다.

    이들은 태평관 사랑방 모임이 안부 인사나 나누는 친목회가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학자들은 가장 먼저 방대한 한국 관계 자료들의 실체를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했고, 정기적으로 세미나를 열어 주제 발표와 토론을 하자, 이 내용을 녹음해서 테이프나 CD에 담아보자, 태평관 홈페이지를 만들어 원로학자들이 일반인과 접속할 기회를 갖자, 일반인을 위한 공개강좌를 열자 등등 다양한 의견을 쏟아냈다. 이어령씨는 “재산만 사회에 환원할 게 아니라 마지막 지혜까지도 사회에 환원하고 가야 한다”고 말한다. 태평관 모임은 그 시작일 뿐이다.   (끝)


    주간동아
    김현미 기자 khmzip@donga.com
    발행일 : 2003 년 01 월 09 일 (367 호)
    쪽수 : 58 ~ 59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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