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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적 사유의 의미


유교적 삶이란 경전적 삶을 말한다. 이때 경전적 삶이란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가? 요즘 말로 텍스트로서 가치화되는 삶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텍스트로서 가치화된다는 것은 경전텍스트의 어떤 해석된 의미를 고수한다는 뜻은 아니다.텍스트란 문자로 구성된 의식의 세계를 말하고 나의 세속적인 삶을 평가하고 유지할 "나의 텍스트"를 보유 유지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나의 총체적 사고와 정념의 존재를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며 그 사고와 정념을 텍스트화함으로서 우리가 적극적으로 그 텍스트화된 "나"를 평가 해석 사고할 수 있다는 것이고 비언어적 직관까지를 포함하되 그 구현에 있어서는 언어적 텍스트로 전환된 길을 고수한다는 것이다.

나의 삶이 텍스트적으로 진행되고 변화 발전하여 나아가는 것이 안전하고 활력에 넘치며 보다 창조적일 수 있는근거는 무엇인가?

우리가 텍스트적 삶을 방기하고 몸과 마음의 느낌과 욕구를 그대로 분출하되 그 때마다 절제하고 조절하기는 쉽지가 않다. 물론 성인(聖人)의 경지에 든 사람이라면 그것이 가능할 것이다.공자의 뛰어난 제자들의 경우도 하루에 한번 한달에 한번 인(仁;완벽한 조화로 구성되는 심신의 상태)의 경지에 도달한다고 하였다.

우리의 삶은 불안정한 겻이 결국 문제일것이다.그 불안정함을 동심(動心=맹자의 不動心의 반대적 의미에서)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 이 동심이야말로 우리의 삶 자체를 불안정하고 소모적이며 반창조적(反創造的) 작용을 하는 것임을 우리는 수시로 경험한다.

심신의 불안정함을 극복하는 길은 인(仁) 의(義)의 길이라고 맹자가 공언하였다.

여기서 맹자가 말하는 인 의의 길이란 바로 이상적인 심신의 균형 속에서 얻어지는 궁극의 가치 평가를 지칭한다.

환언하면 우주의 의미 삶의 의미 우리들 생사의 의미마저 인의라는 말로 규정할 수 있다는 최고의 가정에서 출발한다.서양철학에서 말하는 <가정적 사유>가 꼭 그런 것인지는 단언할 수 없으나 학신할 수 있는 것은 이 인(仁) 의(義)의 가정이 막연히 나온 것이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의 각종 경험을 망라하고 숙고한 결과를 지칭하는 그 무엇이기도 하다. 바로 그 점이 우리들이 하나의 당위나 전제명제로 받아들임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게되는 이유이다.

나의 각급의 삶이 나의 주관적 텍스트일 뿐만아니라경전의 개념과 자연의 현상과 현재의 나의 삶의 상황과 조화를 이룰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이상적인 나의 텍스트일 것이다.

예를 들어 가정에서 누구나 이상적인 교훈을 세워두기를 바란다,그러나 그 가훈이 나의 정념과 일치되지 않을 경우 무용지물이 된다. 더구나 그 명구(名句)가 귀챦을 정도로 나를 제한한다고 느낀다면 그 역할은 극히 부정적인 데 그칠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삶의 텍스트는 자발적으로 지율적으로 수용하는 정도에 따라 그 사활이 결정된다. 텍스트의 사활은 그대로 나의 삶의 사활과도 밀접한 연관을 가지게 된다.

다행히도 그러나 대개의 사람들은 이미 스스로 나름대로의 절대적 자기텍스트를 가진 이들이 많다. 예를 들어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이는 불의를 용인하지 않는다는 자기 텍스트를 가졌기 때문이다.

일정한 특징과 인격을 분명하게 드러내며 사는 사람들은 거개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와 같이 자기텍스트를 중시하는 사람들이다.

이를 조금만 적극화하고 보다 더 나의 삶의 중심으로 끌어들여 나의 모든 삶이 그 텍스트들에 의해 윤용될 수 있다면 그는 완벽한 유자(儒者)일 것이다.

물론 이 때 그 택스트를 빌려쓰는 경우도 생긴다. 빌려 쓰는 경우도 없는 것 보다는 낫다.그러나 그런 경우는 유학적 삶이라고 인정받을 수는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인(仁) 의(義)의 정신을 빌어 중국의 춘추시대를 지배한 패자(覇者/五覇)들은 유교적 텍스트를 구현한 점은 높이 평가할 수 있겠으나 이상적 정치와는 거리가 있다.

이같은 텍스트적 삶을 제일 먼저 제시한 것이 공자였고 그가 논어에서 학이시습(學而時習)을 강조하였던 순간에 세상에 공표된 삶의 유형이다.

일반적으로 신념을 가진 삶이 텍스트적 삶과 유사한 것일 것이다.그러나 단순한 신념은 주관에 빠질 위험이 있으므로 균형된 학(學)이 필연적으로 요구되게 된다.

경전은 양질의 최고 텍스트의 보고이다.그러나 그 텍스트는 그대로 의미를 지닐 수 없고 새로운 시대와 순간을 숨쉬며 새로 일어날 경우에 한하여 생명을 얻게 된다. 공자가 학(學)-습(習)-시(時)를 함께 언급한 이유이다.

공자의 <학> <습> <시>는 매우 중대한 의미를 독립적으로 싣고 있는 것이다.이상적 텍스트의 본질(학) 실천과 구현(습) 새로운 텍스트의 창조적 운용(시)등을 언명한 중대한 선언일 것이다.

경전은 바로 그러한 텍스트의 창조 유지를 위한 위대한 설계를 구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이안자 夏夷案者
the 1st.haian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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