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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사상사는 요순(堯舜) 삼대(三代)에서 출발한다.
경전(經傳)이 전하는 중요한 사상사적 문맥이다.

요순(堯舜) 시대는 선양(禪讓)으로 나라를 전하였고 하(夏) 은(殷) 주(周) 삼대 시대에는 부자(父자)의 왕위계승이 시작되었다.이러한 사실은 초기 사회에서 국가적 발전이 이루어져온 과정을 설명하는 것이다.

유교 사상사는 국가의 형성 발전의 역사와 함께 시작하여 국가의 역사와 함께 지속된 하나의 역사 실체였다고 할 수 있다.

요의 선양을 받은 순은 동이족(東夷族)이었다.
주왕조(周王朝)를 건설한 문왕(文王)은 서이족(西夷族)이었다.

공자시대에도 대륙 북방에는 구이(九夷)가 살고 있었다. 그들의 일부가 중국역사세계로 들어가 왕조를 개창하였던 것이다.

동이족 순(舜)은 사상사적으로 효(孝)사상의 구현자였다.

유교형성사의 중심시대는 청동시대에서 철기시대에 걸쳐있는데 이 시대를 지배한 의례는 제사였으며 중심사상은 효였다. 우리는 은 주 시대의 수많은 청동기가 제사의례용으로 제작되었음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 명문(銘文)에는 수많은 영효(永孝)라는 글귀 즉 길이 효도한다는 제문을 읽을 수 있다. 바로 그 효의 정신과 제사의례의 창조자로서 동이족은 대륙의 북방에 유교사상의 중심을 굳건히 세웠던 것이다.

논어에 이어진 효 사상은 "효는 백가지 행실의 근원이다" "효는 인(仁)의 근본이다"라고 선언하고 있다. 중국학자들은 이를 해석하여 효는 인을 행하는 출발이라고 본다. 효가 인은 아니라는 말이다. 다만 인의 정신을 실천하기 위해 효가 그 출발이 된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그 주석은 동이족이 유학사상사에 미친 영향을 축소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 효는 사상이 아니고 행동의 지침이라고 봄으로서 이(仁) 사상을 고치원적인 것으로 승화하고 효정신을 세속적인 것으로 구분해 내리려는 중화주의적 왜곡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본래 유학에서 학(學)이란 행동-생활 개념이었다.사상적 문화적 비세속적인 그런 이념이 아니었다. 자하(子夏)가 "어진이를 높이며 부모를 극진히 섬기고 몸을바쳐 군주를 빋들며 신의로서 벗을 대한다면 비록 배우지 않았어도 나는 그를 배웠다고 하리라고 하였다.

이때 그가 배웠다는 것(學)은 문헌을 배웠다는 것이다.(學文) 그리고 그 학문(學文)보다는 그의 삶이 학(學)에 해당한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역시 중국 학자들은 이를 두고 자하의 말이 지나치디고 하였다.이 역시 유학을 왜곡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유학은 그대로 삶이기 때문이다.

자시를 지내는 일 제문을 올리는 일 그것이 효도의 대표적인 일이고 공자도 장례의례가 생존시의 봉양보다 중요하다고 하였다. 현세의 효도도 중요하지만 효도의 정신을 이어감이 더 중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정한 효도는 부모의 삶에 의해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공자는 그 당시의 사회적 혼란을 한탄하여 자주 동이족을 말하였다. (1)이적 나라에 군주가 있으니 중국 땅에 군주다운 군주가 없는 것과는 다르다 (2)동이 나라에 살고싶다.(3)떼배베를 타고 바다로 떠나가고 싶다.

등등의 언급이 그것이다. 공자가 동이에 살고싶다고 하자 제자들이 물었다. 누추한 곳에 어떻게 살으시겠느냐고...공자는 말하기를 "군자가 살고 있거는 무슨 누추함이 있느냐"고 제자를 질책하였다.

동이족은 군신의 의리가 확고하고 질서가 있으며 군자다운 삶이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한 것으로서 당연히 효의 정신으로 지탱되는 견고하고 강인한 정신적 가치가 전승되고 있음을 찬탄한 말이다.

우리가 우리들의 역사와 사상사를 곰곰히 돌아보아야할 이유는 분명히 있다. 예를 들어 개인의 삶에서 지나온 역정을 돌아보지 않고 진정으로 성취할 수 있는것은 거의 없을 것이라는 사실과 상통하는 그 무엇이다.

유사이래 우리의 역사는 대개 부정적으로 보이온 것이 그 동안의 숨길 수 없는 자기사(自己史) 이해의 한계였다. 예를 들어 우리는 약소국으로서 살아왔다는 인식이라든가, 그로 인해 가지게 되는 문화적 자신감에 대한 믿음의 박약함 같은 것이 있었다.

실제로 제국시대 이래로는 한국인은 대륙의 광대국가인 중국의 적수가 될 수는 없었다. 경제력 인구 무력 그 어떤 분야에서도 우리는 그 힘의 지배를 받아온 것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는 측면도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건 확실히 그렇다.

그러나 역사가 혹은 역사의 궁극의 힘이 그러한 경제력이나 무력에 오로지 의지해 그 방향이 정해지고 흘러간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어느 사람 어느 민족이 영원한 힘에 충실히 의지하는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여러 종류의 힘이 이 세계를 이끌어가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함을 좌우하는 것은 정신이기때문이다. 우리의정신과 심성의 힘과 이름다움이 결국은 가치로운 성취의 진정한 바탕일것이다.

힘은 가변적이며 유동적이다. 그러나 심성의 힘은 영원하고 보다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중국은 구조적으로는 강력한 국가 무력 경제력 인구를 구비하였지만 그리고 때때로 광대한 세계제국을 이룩하였지만 그들 역사의 내면을 보면 오히려 상시 북방민족의 무력 침공을 받았고 그 역사의 반정도를 북방민족의 지배를 받았다. 즉 기나긴 식민시대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북방의 야만족에게 나라의 전부 혹은 일부를 빼앗기고 그들의 문화와 삶의 양식에 많은 변화를 받아왔다.주지하듯이 그 끝에 중국은 일본의 침략을 받았었다. 한국도 물론 그와 같은 국제정세에 민감히 영향을 받으며 살았지만 오히려 북방족에의한 식민사의 경험은 거의 없었다.그들에게 굴종했던 역사는 있었지만 그들과 통합되는 일은 없었다. 따라서 일본의 참략은 한국으로서는 뼈아픈 것이었다. 대륙의 문명국대 야만국의 대결구조가 자주 긴장을 불러왔었던 것은 오히려 일상사였던 측면이 있다.

일본의 침략이 특기할 만한 것이었던 까닭은 동서문명의 융합기의 초두에 그새로운 물결에 다소 먼저 오른 일본의 힘이 형성되었었다는 사실이다.그것은 과거 청동문명이나 철기혁명의 시기에 있었던 문화적 전파과정에서 일어났던 일과 유사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여러 역사 변동의 요인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 역사를 끌어가는 진정한 힘의 원천은 이념사와 심성사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역사상의 정신사는 당연히 유교사상사이다.
그러나 그 유교사상사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일고 있는 그런 오로지 교의적인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효(孝) 이념은 원래는 신비적 제례의식의 이념이었으며 공동체 삶의 중심이념이었다. 생활의 지침이나 윤리를 상하로 넘어서서 절실한 삶의 양식이었으면서 동시에 깊은 사색의 준거였고 그것은 또한 단지 어떤 논리적 사유만으로 인위적으로 결정된 그런 명제도 아니었다.

삶과 의례의 중심 아이디어이기 이전에 보편적 사유법이며 철학적 성찰이었다. 그리고 그 바탕은 튼튼한 생활감정 위에 진행된 다양한 경험적 성찰의 귀결이었다는 점을 특히 유념할 필요가 있다.

효의 바로 아래로는 가족정신을 거느리고 있고 그 내부로는 자녀와 부부 부모사이의 불가분한 가족애가 있다. 그리고 그 위로는 그 가족에를 실현하기위한 치열한 삶이 있다. 바로 실천적인 인(仁)의 정신이다,

효는 단순한 도덕율이 아니고 입체적인 삶의 지표이다.

특히 사상전통 가운데 효를 논하는 까닭은 오늘날 일반적으로 효 이념을 부정하려는 사람은 감히 없는 것 같으나 실제로는 이 효의 이념을 상당히 낡은 것으로 생각하는 이가 많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효 정신이 젊은이를 억압하는 봉건적 혹은 전근대적 이데올로기로 본다거나 남성중심의 사상의 잔재라고 보는 왜곡된 관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실른 완벽하게 효를 행하기는 어렵고 또 일방적인 것이어서도 아니되겠으나 이 정신은 전통이념 가운데 중심을 이루는 것임을 적극 받아들이고 소화할 필요가 매우 절실하다고 생각된다.



夏夷案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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