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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WTC 테러 참사라고하는 미증유의 대량샬륙 사건을 보면서 이는 20세기가 창조하고 발전시켜온 문명이 정신면에서 중대한 결함(缺陷)과 공극(空隙)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않을 수 없다.

세련되지 못한 <문명충돌론> 같은 어설픈 이론으로는 그 비극의 진정한 정체를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놀라운 것은 21세기의문을 열면서 초강대국 미국이 힘의 국제외교를 지향하였고 경제대국 일본이 극우보수화의 상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는 새로운 분위기 속에서 이 사건이 일어났다는 사실과 그 참사사건에 대응하는 미국의태도가 테러분자들의 점념과 유사한 과격함을 드러내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왜 놀라운가하면 우선 그 모습에서 볼 때 테러와 극우보수와 극한대응이라는 일련의 움직임이 모든 세련된 현재적인 것들과 부조화(不調和)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현대인의 새련된 옷차림과 맞지않고 웅장한 오페라의 음향와 어울리지 않고 역사 철학 등의 근대이후 명저의 고상한 논리와 대립되며 세련된 사교매너와 말씨와는 더구나 일치되지 않는다.

아름다운 문학과 예술의 신비로운 감각과는 당연히 더없이 크게 부조화를 이룬다.

모든 가치있는 문명 진보의 결과물들과 야성적 행동이 대극을 이루는 참담함이 지속되고 있는 것은 왜인가.

현대사화를 이끌어온 서구지성의 정신적 지도성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우선 반증하는 것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역사상 적어도 유교의 중심국가에서는 야만적 살륙은 일으키지는 않았다. 유교권의 변방민족들이 한 때 강성하여 유교의 중심국가를 살륙한 적은 물론 많이있었다. 만주족 여진족 선비족 그리고 왜구가 그들이다.

그러나 왜구를 제외한 북방민족은 유교의 한 중심국 중국에 틈입한 후 그들에 동화되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유교의 중심국에 진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본은 그런 점에서 특이한 예에 속한다. 유교의 먼 병방국으로서 유교의 중심국가를 침범하였으되 그 지리적 격리성으로 인해 유교의 중심국가에 틈입하지는 못해왔었다. 그러나 그들도 중심국가의 사상과 문화를 존중하여온지가 이미 오래되었었다.

근대화된 일본은 이른바 탈아론을 적절히 내세우며 이시아의 유교중심국가를 저바리려고 시도하였고 그 좌절의 끝에는 다시 유교의 품에 인기려하였다. 그러나 돌아옴은 확신할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의 아시아 이탈의 움직임은 주기적으로 시도되고 있다. 그 대표적 증좌가 침략사에 대한 사죄의 거부이다. 그러므로 일본은 진정한 아시아의 일원이거나 유교의 중심국의 역사 문명적 힘을 믿지않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일본이 가장 먼저 서구화되었기에 그렇게 된 것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한국과 중국에서도 잔통정신과 문화에 대한 과소평가는 매우 커다란 문제였지만 그것은 자신들의 역사에 대한 심각한 비판의 의미가 더 강했다. 탈아론을 주장한 적은 없었다.최근의 영어 공용화주장까지 있었지만 그것은 멀리보지 못한 성급한 세계화에의 이상에서 비롯된 주장이라고 나는 이해한다.

일본이 독일 이탈리아와 함께 전범국이 된 것은 유교의 중심국가의 정신과는 전연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인류사상 최대의 침혹한 양차대전의 중심은 서구라는 점을 우선 상기한다면 유교의 중심국가들의 문명적 가치를 우선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과거 대륙 북방의 흉노족이 서구를 침범하여 처참한 살륙을 감행하였고 이것이 서양인의 뼛속에 사무친 <황인종 공포증>이라는 유전병을 남길 정도로 참혹한 것이었다. 몽고족의 서구 침범도 있었다.이들 서구 침범 세력은 모두 유목세력이었고 유교의 중심국의 침공은 아니었다.

대량 살륙과 테러가 야만의 결과라는 말을 하고 싶다.
현대의 문명사가 과학과 지성을 자랑하였으나 야만성을 또한 해소하지 못하였던 기형적인 것임을 말하고 싶다.
그러므로 그 끝에 일어난 테러사건과 그 대응전쟁의 과격한 시도는 다시 더 분명이 문명속에 내재하는 반문명의 그림자가 실체로서 내재함을 웅변한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그것은 당연히 경제발전의 그늘 속에 빈부격차와 부당한 경제의 조장이라는 야만경제성이 역시 내재함을 말하는 것임은 물론이다.

서구의 문명이 그 물질적 풍요와 권위스런 박력과 외관의 미려함과 세련됨에도 불구하고 더우기 그들의 깊은 철학과 종교의 눈부신 논리와 개념에도 불구하고 그 간극 사이에 대량의 굉대한 야만이 깃들어 있다는 것은 분명 불가사의한 일로 보인다.

그러나 그 대답은 오히려 간단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유교의 중심국이 과거에 신봉해왔던 중용의 정신이라는 개념이 그들에게는 없다는 것 그것이 원인이라고 진단할 수 있다. 중용의 정신은 내외(內외) 상하(上下) 전후(前後)가 유리되지 않는 일치조화를 추구하는 오랜 정신태이다.

단적으로는 사려의 기초인 경험적 균형과 사려의 결과인 개념간의 균형 그리고 나아가 삶과 사려와의 균형을 추구한다는 뜻이다.

물론 유교의 중심국에도 살륙이 있고 야만이 있다 맹자같은 성인이 <인간에게는 야만성이 많고 인간성은 적다>고 하였는데 그 적은 인간성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함을 알았다. 양적 거대자인 야만과 양적 미소자인 인간성을 그 양에 현혹되지 않고 질을 주목하여 양자의 균형이 절묘한 삶의 길임을 알았다. 삼차원의 경험에 논리적 차원을 더하여 4차원적인 중용이론을 발전해왔던 것이다.

나는 새로운 세기의 빛은 균형 조화에서 나온다고 확신한다.

정보화가 새로운 물결이라거나 가슬혁신이 살길이라는 말은 신문명의 주변을 묘사하는 변경어(邊境語)에 불과하다.

세계화의 시대는 유교의 표면을 요구하지 않고 그 심층의 정신의 힘을 요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이안자 夏夷案者
the 1st. haianist

禾 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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